손정의(마사요시 손)가 SoftBank World 2026 기조연설에서 66분 동안 쏟아낸 숫자들, 들으면서 계속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이 양반, 던지는 숫자의 규모가 넘사벽이다.
비전은 형용사가 아니라 기한과 숫자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손정의가 “많이”, “엄청”, “대단히” 같은 형용사를 경멸했다는 대목입니다. 형용사를 쓰는 순간 윤곽이 흐려지고 전략이 안 선다는 것. 그가 내린 비전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타임머신 타고 15년 뒤를 보고 온 것처럼 말하는 것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예언자일 필요 없어요. 저도 예언자 아닙니다. 조사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매일.” 이 문장이 핵심 같습니다.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매일 조사하고 생각해서 기한과 숫자로 말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 그게 비전이라는 얘기죠.
일본식 경영의 급소를 찌른 첫 마디도 통쾌했습니다. 사장 취임사마다 나오는 “화(和)를 이루자”는 말. 배가 산 위로 올라가는데 선원끼리 사이가 좋으면 뭐 하냐는 겁니다.
14년 뒤의 숫자들
2040년 전망은 규모가 좀 아득합니다.
- 세계 GDP의 20%를 AI가 대체, 연매출 7,000조 엔 / 이익률 50%로 연 3,500조 엔 순이익
- GDP 비중은 20%인데 주식 시가총액으로는 80%
- AI 에이전트 100조 개가 24시간 가동
- 휴머노이드 10억 대 × 24시간 = 인간 30억 명분 (지구 실제 노동인구가 약 30억)
- AI 데이터센터 전력 3테라와트, 이후 매년 1테라와트씩 증설
- 연간 투자 5조 달러 = 800조 엔
개인적으로 가장 설득력 있게 느낀 건 인터넷과의 비교였습니다. 인터넷이 대체한 건 GDP의 1%인 광고 시장뿐이었는데 그 1%로 구글·아마존·메타가 세계 부의 꼭대기를 먹었다는 것. 1%가 그랬는데 20%면 어떻게 되겠냐는 논리입니다. 반박하기가 쉽지 않아요.
동시에 균형감도 있습니다. “나머지 80%는 변하지 않는다. 15년 뒤에도 햄버거 먹고 우동 먹고 주말엔 공원 갑니다.” 전부가 뒤집힌다고 말하지 않는 점이 오히려 신뢰를 줍니다.
“9억일 수도 20억일 수도 있어요. 그건 오차입니다”
숫자를 대하는 태도가 재밌습니다. 휴머노이드 10억 대라는 숫자를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9억일 수도 있고 20억일 수도 있어요. 그건 오차입니다. 비전에서 중요한 건 스케일이지 소수점이 아닙니다.
정확도가 아니라 자릿수를 보라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반대로 하죠. 자릿수는 안 보고 소수점만 따집니다. “내년 매출 3% 성장이냐 5% 성장이냐”로 회의를 몇 시간씩 하는데, 정작 “우리가 있는 판이 10배가 되는가 1/10이 되는가”는 아무도 안 묻습니다.
쿠에타 — 손목시계를 걸었지만 아무도 답하지 못한 질문
기가 → 페타 → 엑사 → 제타 → 요타 → 로나 → 쿠에타(10의 30승). 경영자 3,000명 앞에서 “엑사 다음 아시는 분?” 하고 손목시계를 걸었는데 답한 사람이 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
쿠에타를 모르는 사람이 AI를 논하지 마세요.
도발적이지만 단위를 모른다는 건 규모 감각이 없다는 뜻이고 규모 감각이 없으면 판단도 없다는 얘기로 읽힙니다.
가장 서늘했던 대목: 취약점 0인 회사는 없었다
추상적인 미래 얘기들 사이에서 유독 현실적으로 다가온 건 7번 항목이었습니다. 소프트뱅크가 미국 정부로부터 AI 사이버 공격 도구 라이선스를 받아 자기 회사부터 공격해봤더니, 20년간 한 번도 뚫린 적 없다던 통신 인프라에서 취약점 10,500개가 나왔다는 것. 일본 대기업 63개사를 2주간 진단한 결과 코드 1,000만 줄당 취약점 280건, 취약점 0인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고 합니다.
2040년 얘기는 먼 미래라 흘려들을 수 있지만 이건 지금 당장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소프트뱅크는 2주 만에 1,000명 규모 방어 부대를 편성했다고 하죠. 말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ROA의 재정의는 당장 써먹을 만하다
실무적으로 가장 쓸모 있어 보인 건 ROA를 Return on AI로 바꿔 읽으라는 제안이었습니다. AI에 10억 엔 넣었으면 10억 엔 이상의 비용 절감이나 매출 증대가 있었는지 측정하라는 것. 그리고 1~2년 차는 연습 기간이고 3년 차부터 리턴이 나오니 3년 스팬으로 계산하라는 조건까지 붙였습니다.
이건 규모와 상관없이 어떤 조직이든 내일부터 적용할 수 있는 프레임입니다. 지금 AI 도입 논의가 대부분 “뭘 도입할까”에서 끝나는데, “어떻게 측정할까”까지 가야 진짜 경영 언어가 되니까요.
일자리를 뺏는 건 AI가 아니다
이 부분도 동의합니다. AI가 일자리를 뺏는 게 아니라 AI를 쓰는 기업이 안 쓰는 기업의 일자리를 가져간다는 구조. GDP는 계속 늘어나니 총량이 주는 게 아니라 재분배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업종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조언. 자기 전문 분야에 AI를 무장시키면 되고 데이터도 경험도 이미 있으니까. 자동차가 발의 확장, 비행기가 날개의 확장, TV가 눈의 확장이었듯 AI는 두뇌의 확장이라는 비유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유효합니다.
겸손한 사장은 리더가 아니다
마무리가 압권입니다. “CEO의 할 일은 딱 하나. AI다! AI다! AI다! 외치는 겁니다.” 업계 3위라면 15년 안에 세계 1위 하겠다는 기개가 있어야 사장 자격이 있다고. 일본 대기업 사장 평균 임기가 5년이라 “15년 뒤요? 나 아닌데”가 되는 것, 그게 무책임의 본질이라는 지적은 뼈아픕니다.
선배가 했던 말은 전부 무시하세요. 상식이 바뀝니다.
정리하며
어디까지가 예언이고 어디까지가 허풍인지는 각자 판단할 몫입니다. 저도 7,000조 엔이나 100조 개 같은 숫자를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사람은 저 숫자에 실제로 전 재산을 태우고 있어서 그냥 웃고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대기업 오너나 CEO라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임기 5년짜리 계산기 두드리며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말하는 리더와, 14년 뒤 숫자를 못 박고 거기에 전부를 거는 리더. 어느 쪽 배에 타고 싶은지는 명확하죠.
손정의 말대로 스케일이 중요하지 소수점은 오차라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질문도 바뀌어야 합니다. “AI 도입할까 말까”가 아니라 “14년 뒤 우리는 어떤 숫자 위에 서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기한과 숫자로 답할 수 없다면, 아직 비전이 없는 겁니다.